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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의 성장(한능검)

Rang Rang2 2024. 2. 2. 15:04

약 2000년 이상 되는 단군조선이 한 무제에 의해서 무너지게 됩니다. 단군조선부터 출발했던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 군현이 설치되었지만 이를 공격하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나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 철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나라가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입니다. 이 나라들의 정치, 경제, 풍습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여

고조선 다음으로 요서 지역에 나라를 세운 것은 부여입니다. 부여는 고구려에 의해 완전히 병합될 때까지 거의 1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여는 평야가 넓은 지역으로 농업과 더불어 목축(반농반목)을 하고 있었는데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합니다. 

 

부여는 5부족 연맹체의 국가입니다. 각각의 군장들이 다스리는 지역이 있고, 왕을 중심으로 하여 이 지역들을 연맹시켜서 운영하고 있는 나라를 연맹왕국이라고 합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중에서 부여와 고구려에만 왕이 있었고, 나머지 3개의 나라는 군장이 있었습니다. 또한 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5 부족 연맹체의 국가였습니다. 

 

부여에는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 있었고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말), 우가(소), 구가(개), 저가(돼지)가 각각의 지역을 다스렸는데, 이를 사출도라고 합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습니다. 

 

이 연맹왕국의 특징은 왕에게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때의 왕은 선출되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지역은 군장들에 의해서 자치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왕이 간섭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습니다. 

 

부여의 풍속으로는 12월에 열리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습니다. 전 국민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리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습니다. 

 

부여에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으며,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12배로 갚도로 하는 1책 12 법과 같은 법이 있었습니다. 부여의 결혼 풍습은 형사취수제인데, 이는 형이 죽으며 그 동생이 형의 부인 즉, 형수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장례 풍습으로는 순장 제도가 있는데, 이는 주인이 죽으면 노비들이 함께 매장되는 것입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고구려

고구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7년경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 출신의 사람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부여와 비슷한 문화적 전통이 많이 있습니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역에 자리 잡았는데,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고, 동쪽으로는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소금 등)을 받았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5부족 연맹체의 국가입니다. 고구려에는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가(加)' 들이 있었고, 여러 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데 이러한 회의를 '제가 회의'라고 합니다. 또한 왕의 밑에 왕을 서포트해주는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가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결혼 풍습에는 부여와 비슷한 형사취수제도가 있습니다. 또한 서옥제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서옥제란 혼인을 정한 뒤 신부집 뒤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입니다. 당시에는 농사를 지을 때 노동력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여성이 혼인으로 그 집에서 나가면 노동력이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므로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남성이 혼인을 한 이후 일정 기간 동안 여성의 집에서 함께 거주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해 준 후에 여성을 남성 집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고구려에는 부여와 비슷한 1책 12 법이 있었고, 10월에는 추수 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옥저, 동예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동해안 지역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옥저는 낙랑군에 속했다가 기원후 1~2년에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고구려에 복속하여 소금, 어물, 맥포(짐승 가죽)등을 갖다 바쳤습니다. 

 

옥저와 동예는 왕이 없고 군장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군장을 읍군, 삼로라고 불렀습니다. 옥저에는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어린 여자 아이를 미리 신랑 집에 데리고 와서 살다가 뒤에 돈을 지불하고 며느리로 삼는 제도를 말합니다. 장례풍습도 독특했는데, 시체를 가매장했다가 썩은 뒤에 다시 뼈만 추려서 큰 목곽(돌로 만든 관)에 담고, 다족들의 시신도 여기에 합장하는 가족 공동묘 풍습이 있었습니다. 

 

동예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지역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습니다. 특산물로는 명주와 삼베, 단궁이라 불리는 활, 과하마로 불리는 키가 작은 말, 그리고 반어피(바다표범 가죽) 등을 생산하였슷ㅂ니다. 같은 씨족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 족외혼의 풍습이 있었고, 경제도 자기 구역 안에서만 행하고, 다른 부족의 구역으로 들어가면 책화라고 하여 노비, 소, 말등으로 변상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매년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습니다. 

 

동예는 독특한 집터의 모습이 있는데 철(凸)자 모양과 려(呂) 자 모양의 집터가 발굴되고 있습니다. 

 

동예의 집터

삼한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남하해 오는 유목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어 사회가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크게 세 권역을 형성하는데 이를 삼한이라 불렀습니다.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의 '마한', 경상북도 지역의 '진한', 경상남도 지역의 '변한'이 그것입니다. 삼한은 통합된 국가가 아니고 크게 몇 종류의 집단이었다는 뜻입니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습니다.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인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렀습니다. 

 

삼한 정치적 지도자 외에 제사자인 천군이 있었고, 신성한 지역인 소도가 있었습니다. 소도에는 솟대가 있는데 이 소도를 다스리는 사람이 천군이고 이곳에서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습니다. 삼한에서 천군이 하는 기능은 제사의 역할을 하고, 신지, 읍차 등은 정치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즉, 제사장이 하는 역할과 정치를 하는 역할이 서로 다른, 제정분리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한에서도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과 비슷한 제천 행사가 있었는데 5월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수릿날, 10월에는 추수를 감사하는 시월제를 지냇습니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사회였습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습니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의 성장

 

 

고조선의 건국(한능검)

 

 

연맹왕국과 중앙집권 국가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여러 소국이 성장하게 됩니다. 최초의 국가는 군장국가, 연맹 왕국, 중앙 집권 국가의 단계를 거처 발전하였습니다. 군장 국가 시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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